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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 남생이 외

현덕은 1938년 「남생이」를 통해 문단에 등장한 직후부터 밀도 있는 문장과 치밀한 묘사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선작품 독후감을 통해 안회남은 “현문단의 최고 수준”이라고 격찬했고, 박태원도 “우리는 한껏 부끄럽다”는 말로 작품의 문학성을 고평했던 것이다. 현덕의 작품이 이처럼 당대의 여러 작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었던 것은 경향소설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울한 현실의 모순을 소설적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과 방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덕은 1938년 「남생이」를 통해 문단에 등장한 직후부터 밀도 있는 문장과 치밀한 묘사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선작품 독후감을 통해 안회남은 “현문단의 최고 수준”이라고 격찬했고, 박태원도 “우리는 한껏 부끄럽다”는 말로 작품의 문학성을 고평했던 것이다. 현덕의 작품이 이처럼 당대의 여러 작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었던 것은 경향소설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울한 현실의 모순을 소설적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과 방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 서울 삼청동의 한 별장에서 태어났다.(1912년에 출생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조부 현흥택(玄興澤, 1858~1924)은 구한말 궁궐의 수비대장으로서 종2품에까지 오른 적이 있지만, 부친 현동철(玄東轍)이 금광에 손을 대 가산을 탕진하자 인천 부근의 대부도에 있던 당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부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여 동안 공부하고 중동학교 속성과를 마친 뒤 1925년 제일고보에 입학했으나 학비 때문에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중퇴했다.
이후 수원 발안 등지에서 막노동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오사카 등지에서 신문배달·페인트공 등으로 일했다. 건강 때문에 귀국하여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이 가작으로 뽑히고, 《신생》에 시 「봄」을 투고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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