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는 이 희곡을 모스크바의 말리 극장을 염두 해 창작하였으나, 이 극장의 무대에서 공연되지 못하고, 1897년 11월 페체르부르그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실패한다.
이후 ‘갈매기’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가 이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를 계기로 체호프의 희곡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해석이 촉발된다.
‘갈매기’ 공연 이후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체호프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모든 희곡의 제목 아래 그 작품의 장르를 기록한 체호프는 ‘세자매’를 처음에 희극이라고 했다가 드라마로 고쳤고, ‘숲의 정령’, ‘갈매기’, ‘벚나무 동산’은 희극, 세 자매는 드라마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들 작품 모두를 희극이나 보드빌이라고 불렀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극적인 해석에 대해 부정적인입장을 취했다.
체호프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가장 많이 논쟁을 한 부분도 바로 희곡의 장르에 대한 다른 인식 때문이었다.
‘세자매’는 체호프의 다른 희곡에 비해 외적인 갈등의 체계도 명확하고, 멜로드라마의 삼각관계의 비중 있는 전개와 무대에서의 주인공의 자살 등이 무대 효과를 야기 시키는 등 전통적인 희곡의 틀을 많이 따르고 있고, 그래서 많은 연구가들이 이 희곡을 체호프의 새로운 극작 원리가 보다 명확하게 적용된 4대 장막극과 구별하고 있다.
안톤 체호프 Chekhov, Anton Pavlovich(1860~1904)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860년 1월 남 러시아의 아조프 해에 면한 작은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상인 파벨 체호프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중학을 고학으로 마쳤다. 1879년에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단편소설을 오락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전반 수 년 동안에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 (1884),<하사관 프리시베예프>(1885), <슬픔>(1885) 등의 뛰어난 단편을 발표했다.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와 1901년 결혼하고, 3년 후 독일의 요양지 바덴바덴에서 세상을 떠났다.